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붉은 돼지 (문단 편집) == 제작 과정 == [youtube(YXmON1bnkF4)] {{{#!folding 스즈키 토시오가 밝힌 제작 비화 1 ▼ ||[[1991년]]에 개봉한 「[[추억은 방울방울]]」은 [[스튜디오 지브리]]가 스태프를 정규직으로 고용해서 만든 최초의 영화였다. 정규직 직원을 두고 스튜디오를 운영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영화를 만들어야 함을 의미한다. 즉, 「추억은 방울방울」을 만들면서 다음 작품도 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미야는 「추억은 방울방울」의 프로듀서로 일하는 한편, 자신이 감독할 다음 작품의 구상에 들어갔다. 스태프를 정규직으로 채용하자고 말한 사람도 미야지만, 연속해서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드는 일에 가장 압박을 느낀 사람도 미야였다. 본인도 말을 꺼내기는 했지만 실제로 실천하는 일이 그토록 힘든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제작하는 것만 해도 엄청난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는데, 관객을 즐겁게 해주고 히트시켜야 한다는 압박감까지 더해지면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집 토토로]]」, 「[[마녀 배달부 키키]]」를 잇달아 만들면서, 그 대단한 미야 감독도 온몸의 진이 빠졌다. 본인이 말을 꺼낸 이상, 다음 작품은 사이를 두지 않고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장편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는 양쪽을 한꺼번에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머리를 짜냈다. 그래서 나온 것이 15분짜리 단편을 만드는 아이디어였다. 기본이 된 것은 본인이 모형잡지에 연재했던 「비행정시대」라는 만화였다. 그가 좋아하는 비행기물에 단편이라면, 심정적으로는 취미로 소장하는 작품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것을 취미가 아니라 경영면에서 도움이 되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내게 부여된 업무였다. 맨 처음 생각한 것은 굉장히 소박한 아이디어였다. 비행기 이야기이니까 비행기 회사에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 「[[마녀 배달부 키키]]」를 [[LA]]에 사는 일본인을 위해 상영할 때 일본항공 문화사업센터와 같이 일한 것을 떠올리고, 그때 알게 된 이케나가 기요시를 찾아갔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이자 미야자키 하야오의 최신작인 비행기 영화를 일본항공의 기내에서 상영하지 않겠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더니 이케나가는 곧바로 관심을 보였다. 그거 재미있겠군요. 하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적지 않아 어려울 수도 있겠다며 말을 흐렸다. 나는 일단 검토해달라고 부탁한 뒤 사무실을 나섰다. 자아, 이제 어떻게 할까? 다음 단계를 생각할 즈음, 대학 친구인 나마에 다카유키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도호학원 이사장을 역임하신 분이라서 그런지 장례식에는 조문을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분향하는 줄에 서 있었더니, 놀랍게도 내 앞에 이케나가가 있는 게 아닌가. 스즈키 씨,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이야. 그날 이후 그는 갑자기 의욕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본인은 관계사에 있어서 프로젝트에 직접 관여할 수 없고, 실무를 진행할 사람으로 문화사업센터의 가와구치 다이조라는 사람을 소개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일본항공([[JAL]])을 등에 업고 「[[붉은 돼지]]」를 제작하기로 했는데, 당시 스튜디오에서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추억은 방울방울]]」의 제작이 또 늦어진 것이다. 그때까지 장편 애니메이션 대작의 작화기간은 평균 3개월에 불과했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시끌별 녀석들 1 Only You]]」도 3개월. 미야의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도 4개월만에 마무리되었다. 그 작품들과 비교하면 「추억은 방울방울」의 2년이라는 기간이 얼마나 이상한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그로 인해 「붉은 돼지」의 제작 시작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고 「추억은 방울방울」이 막바지에 몰려 있던 어느 날, 내 책상 위에 미야가 쓴 메모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붉은 돼지를 나 혼자 만들라는 건가? 화가 난 것은 이해하지만 모든 스태프가 「추억은 방울방울」에 투입되어 있어서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스태프를 정규직으로 고용한 첫 작품이 성공하느냐 마느냐 하는 중요한 때다. 만드는 것도 힘들지만 개봉이나 홍보 일도 장난이 아니라서, 「붉은 돼지」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 메모는 깨끗이 무시했다. 「추억은 방울방울」을 개봉한 뒤, 겨우 한숨 돌리고 현장은 2주간 휴가에 들어갔다. 「붉은 돼지」의 그림 콘티를 완성하지 못한 미야만 제외였다.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어서, 나도 휴가를 반납하고 그와 같이 그림 콘티를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며칠 뒤, 그가 그림을 그리다 말고 내 이름을 불렀다. 스즈키 씨. 네? 아내가 「[[추억은 방울방울]]」을 봤다더군. 그래요? 뭐라고 하시던가요? 파쿠 씨의 최고 걸작이라고 했어. 지금까지 내 작품은 한 번도 칭찬해준 적이 없으면서.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그림 그리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작품이 15분밖에 되지 않아서 그림 콘티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그가 그림 콘티를 보여줄 때마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주인공이 처음부터 돼지모습으로 등장하는 게 아닌가. 더구나 보통 사람처럼 태연하게 행동하는데,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미야가 말했다. 다 완성했으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게. 이런 경우에 미야는 반드시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여기는 이렇게 되고, 여기는 이렇게 돼라고 참견을 한다. 완성된 영화에서는 앞부분에 등장하지만 당시 내가 받은 콘티의 마지막은 돼지가 맘마유토단으로부터 아이들을 구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걸 보고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네? 이걸로 끝나요? 애초에 이 녀석은 돼지인가요? 그랬더니 미야가 불같이 화를 냈다. 일본 영화는 너무 시시해! 왜 꼭 원인과 결과를 확실히 밝히려고 하지? 결과만 있어도 되잖아! 미야는 또 그 소리야?라고 화를 냈다. 하지만 워낙 성실한 사람이라 불평을 하면서도 아직 인간이었던 시절의 포르코가 비행정을 타고 있는 장면도 그려주었다. 그러는 사이에 그림 콘티는 60분 정도가 되었다. 그즈음에 나는 그에게 역으로 제안했다. 미야 씨, 처음에는 단편이라고 해서 일본항공(JAL)과 이야기를 했는데, 이럴 바에야 차라리 좀 더 내용을 늘려서, 극장용 장편 영화로 만드는 게 어떨까요? 이제 와서 그런 말을. 이번에도 역시 그는 툴툴거렸지만 그림 콘티를 덧붙여 93분의 장편을 만들어주었다. 라스트 신은 다들 아는 것처럼 돼지와 라이벌인 커티스가 공중전을 그만두고 서로 주먹질하는 장면으로, [[존 포드]]의 영화 [* [[말 없는 사나이]]로 추정된다. 이 영화도 주인공과 라이벌이 서로 희극적으로 주먹질하는 게 클라이맥스다.]와 똑같다. 하지만 이제 이걸로 끝낼 수밖에 없다. 나는 미야 감독의 공범이라고 생각하며 그대로 가기로 결정했다.||}}} {{{#!folding 스즈키 토시오가 밝힌 제작 비화 2 ▼ ||휴가를 마치고 모두 출근해서 드디어 작화가 시작되었다. 이때 나는 미야의 경영 능력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정규직 제도를 시행하면서 그는 나는 영화를 만들 테니까 스즈키 씨는 회사 경영을 해줘라고 말했는데, 나의 영역까지 확실하게 배려해준 것이다. 메인 스태프의 선정만 봐도 그렇다. 「추억은 방울방울」의 제작이 지연되면서 작화감독인 콘도와 미술감독인 오가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녹초가 되었다. 작품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에이스인 그들에게 다시 부탁해야 하지만, 스튜디오를 잘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 밑에 있는 스태프를 선발해야 한다. 어떻게 할까. 머리를 감싸고 고민하는 나를 보고 미야는 이렇게 말했다. 스즈키 씨, 이번에는 스태프를 일신해서 중요한 일은 전부 여성에게 맡기는 게 어때? 여성이 만드는 비행기 영화. 지금이라면 특별할 게 없는 발상이지만 당시만 해도 그의 말은 작품이 약해질 수 있는 상황을 반전시키고 현장의 분위기를 들뜨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래서 선발한 작화감독이 [[카가와 메구미|가가와 메구미]]였다. [[애니메이터]]로서 실력은 뛰어나지만 작화감독을 한 적은 없는 사람이다. 미술감독에는 히사무라 가쓰라는 오가의 제자를 기용했다.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 때, 감독을 보좌하는 가장 중요한 존재가 작화감독과 미술감독이다. 또한 녹음 연출에도 아사리 나오코라는 여성을 발탁했다. 그렇게 해서 가장 중요한 자리에 모두 여성을 선발했다. 이것은 지브리뿐만 아니라 당시 애니메이션계 전체를 둘러보아도 매우 획기적인 일이었다. 영화 속에서 포르코의 비행정을 고치는 피콜로사의 정비사는 피오를 비롯해 모두 여성이다. 그것은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한 장면이다. (''실제로 스튜디오 지브리는 [[여초]] 회사다'') 스태프 선발뿐만 아니라 영화 만드는 방법에서도 그는 경영자의 현실적인 면을 보여주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당시 기용한 메인 스태프들은 그때까지 모두 2진이었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부담을 최대한 줄여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작품의 품격을 정하는 미술을 예로 들면, 미야는 항상 복잡한 건물을 설계하고, 그 건물 안에서 캐릭터를 왔다 갔다 하게 함으로써 재미있는 장면을 만든다. 그런데 그런 건물을 그리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붉은 돼지」에서는 비행정 영화라는 이점을 살려 배경의 중심을 하늘과 바다로 정했다. 덕분에 미술 스태프의 부담이 상당히 가벼워졌다. 작화에서도 어려운 연기가 필요한 장면은 최대한 줄였다. 애니메이터가 캐릭터의 연기를 그릴 때, 가장 힘든 것은 일상의 평범한 동작이다. 「귀를 기울이면」에서 주인공인 시즈쿠가 아침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원래대로 해놓는 장면이 있다. 관객 쪽에서 보면 특별할 것이 없는 장면이다. 하지만 일상의 동작은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에 설득력 있게 그리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하늘을 날거나 서로 치고받는 등 비일상적인 화려한 장면을 그리는 것이 편하다. 지브리 작품의 최대 특징은 일상의 연기를 놀라울 만큼 사실적으로 그린다는 점이다. 반대로 말해 일상생활의 묘사를 줄이면 작화 스태프의 일은 상당히 편해진다는 뜻이다. 미술과 작화에서 수많은 제약을 받아들이면서, 그 안에서 최대한의 재미를 보증한다. 이것이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능력이고, 경영자 미야자키 하야오의 현실주의다. 제작이 막바지로 치닫는 가운데, 나는 마음속으로 두 손을 모아 미야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미야의 경영 감각을 알 수 있는 에피소드가 한 가지 더 있다. 신사옥의 설계다. 스태프를 정규직으로 고용할 뿐만 아니라 새 스튜디오를 지어 확실한 거점을 마련하자고 한 것이다. 물론 그때까지 좋은 작품을 만들어왔고 흥행에서도 성공했다. 하지만 스태프들은 가혹한 환경과 힘든 일정으로 피폐해져 있었다. 당시 미야의 눈에는 스튜디오의 상황이 엉망진창으로 보였으리라. 그는 「붉은 돼지」라는 작품과 새 스튜디오를 동시에 만듦으로써 그런 상황을 바로잡으려고 했다. 어쩌면 영화를 만드는 가장 힘든 시기에 큰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스스로에게 부과한 감독이라는 압박감에서 살짝 벗어나 한숨 돌리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세한 속마음은 모르지만 어쨌든 신사옥은 미야가 직접 설계했다. 그가 가장 신경을 쓴 곳은 여성 화장실이었다. 남성 화장실의 두 배로 만든 것이다. 그밖에도 위쪽까지 탁 트인 나선형 계단, 보도블록을 깐 주차장 등등 미야다운 아이디어가 곳곳에 넘친다. 내가 가장 감탄한 점은 소재의 선택이었다. 그는 업자에게 맡기지 않고 천장부터 바닥재까지 카탈로그를 확인하며 전부 직접 선택했다. 건축 소재는 가장 비싼 것과 가장 싼 것의 가격 차이가 무려 스무 배 정도 나는데, 그런 경우에 그는 항상 가장 저렴한 소재를 선택한다. 그리고 싸구려처럼 보이지 않도록 색과 디자인을 절묘하게 조합시킨다. 업자에게 맡기면 엄청난 비용이 드는데, 스스로 초인적인 일을 해냄으로써 싸게 마무리한다. 영화를 만들 때도 똑같다. 정말로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감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새 스튜디오가 완성되자 세무서 직원이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찾아왔다. 고정자산세를 책정하기 위해 건축 도중에 찍은 사진까지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밖에서만 봤는데, 오늘은 내부도 보여주십시오. 그의 얼굴에서는 연신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자산세를 많이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내부를 보여주는 사이에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모든 층을 둘러보고 1층으로 내려왔을 때는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잠시 지나서 그는 겨우 무거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런 건물을 보고 자산 가치를 매기는 데 전문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창조적으로 연구해서 싸게 지은 건물은 본 적이 없습니다. 도대체 누가 설계했습니까? 미야자키 하야오 씨가 직접 설계했습니다. 그 사람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folding 스즈키 토시오가 밝힌 제작 비화 3 ▼ ||기내 상영용 단편으로 출발한 기획이 극장에서 개봉하게 되면서 관계자들은 모두 기뻐했다. 하지만 [[일본항공]] 사내에서는 큰 문제가 되었다. 기내에서 상영할 단편영화를 제작한다면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지만, 극장 개봉작에 투자한다면 회사 정관을 바꾸어야 한다. 최종적으로 사장의 결단에 달린 것이다. 사실 일본항공의 입장에서 가장 궁금한 것은 최대 얼마를 손해 볼까? 하는 점이리라. 영화 흥행은 어느 면에서 보면 조직폭력배의 세계와 똑같다. 그런 것을 미리 꼼꼼히 계산하지 않는 것이다. 역시 탄탄한 기업은 다르다고 여기면서 보고서를 만들게 되었다. 다음에 문제가 된 것은 제목이다. 「붉은 돼지」로 정했다고 말하자 가와구치는 네? 돼지라고요?라고 한 채 잠시 뒷말을 잇지 못했다. 회사로 돌아가서 그는 여직원들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랬더니 다들 네? 붉은 노래요? 제목 좋은데요?라고 좋아했다고 한다. (일본어로 돼지(豚)는 부타이고, 노래는 우타(歌)이다.) 거기까지는 웃음으로 넘겼지만 임원회의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일본항공에서 처음 제작하는 영화의 주인공이 돼지라니, 그건 좀 곤란하지. 더구나 그 제목으로는 홍보부도 움직여주지 않는다고 한다. 가와구치가 다시 난감한 얼굴로 찾아왔다. 결국 내가 직접 홍보부의 기무라 부장을 만나 설명하기로 했다. 그는 나를 기무라 부장 사무실에 밀어넣고는 재빨리 사라졌다. 단둘이 남은 우리는 무릎을 맞대고 기탄없이 논의했는데, 덕분에 나중에 그분과도 친해졌다. 신문광고를 둘러싸고도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기내에서 먼저 상영한 다음, 일본항공 측에서 날면 보인다. 세계 최초 스카이로드쇼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전면광고를 해주기로 했는데, 놀랍게도 그때까지 사장에게 「붉은 돼지」라는 제목을 보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최초의 광고 시안에는 제목이 없다. 뿐만 아니라 포르코의 얼굴도 없다. 비행기의 창밖에서 비행정이 날고 있을 뿐이다. 아무래도 이 상태로는 홍보 효과가 없을 것 같아 포르코의 얼굴을 크게 넣은 뒤 제목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도록 작게 넣었다. 그리고 맞이한 마지막 관문. 도시미쓰 마쓰오 사장에게 완성된 영상을 보여줄 차례다. 지금이니 웃으면서 말할 수 있지만 도시미쓰 사장은 당일까지도 제목을 몰랐다고 한다. 극장 밖에서 마른침을 삼키고 기다리고 있었더니, 도시미쓰 사장이 나와서 좋았습니다라고 말해주었다. 그제야 겨우 다들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일본항공과는 그 후에도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영화가 무사히 완성되고 일본항공의 승인도 받았지만, 개봉까지는 또 커다란 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붉은 돼지」는 [[도호]]의 외국영화 계열에서 배급하기로 했는데, 두 계통이 있는 극장 중에 수용 인원이 많은 쪽은 이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후크]]」가 잡혀 있었다. 즉, 「붉은 돼지」를 상영할 수 있는 곳은 작은 극장뿐이었다. 그래서는 아무리 성공해도 관객이 「후크」의 절반밖에 들어오지 않는다. 열세를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해 처음으로 전국 프로모션 활동을 기획했다. [[도호]]는 처음에 이 기획을 맹렬히 반대했다. 전국적인 프로모션 활동을 진행한 영화가 그때까지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때 도와준 사람이 도호의 니시노 후미오 상무였다. 그와는 「이웃집 토토로」와 「반딧불이의 묘」를 개봉할 때 배급을 둘러싸고 크게 다툰 적이 있는데, 그것을 계기로 오히려 친해졌다. 그는 어떻게든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전국 프로모션 활동을 하려는 내 모습을 보고, 전대미문의 작전을 실행해주었다. 이미 시효가 지났으니까 말해도 되리라. 첫날은 계약대로 대형 상영관에서 「후크」를 상영하고, 밤새 간판을 교체해서 다음 날부터 「붉은 돼지」를 상영한다는 놀라운 방법이었다. 전국 극장주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는 니시노 상무가 아니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단 아무리 니시노 상무라고 관동 지역은 제외였다. 그때 효과를 발휘한 것이 전국 프로모션 활동이었다. 영화 흥행 수입을 관동 지역과 그 이외의 지역으로 나누면 6대 4 정도다. 우리는 그것을 뒤집기 위해, 대형 상영관을 사용할 수 있는 지방에서 새로운 관객을 발굴하기로 했다. 홍보에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바로 시사회다. 관객은 영화를 보고 입소문으로 영화의 매력을 전해주고, TV는 시사회 응모를 알려주는 등 영화 홍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우리는 [[닛폰 TV]]와 손을 잡고 전국 각지의 계열 방송국에서 각각 시사회를 기획해 수십 번이나 시사회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이렇게 해서 홍보, 배급, 제휴 광고 등 모든 요소가 유기적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배급 수입에서 「붉은 돼지」 28억 엔, 「후크」 23억 엔이라는 대역전이 일어났다. 영화는 기획도 중요하고 제작도 중요하며 홍보도 중요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배급이다. 만들고, 팔고, 보여준다. 이 단계가 하나로 이어지지 않으면 히트작은 태어나지 않는다. 「붉은 돼지」는 의식적으로 그것을 하나로 연결한 기념비적인 작품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